경기헤드뉴스 성미연 기자 |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는 「소크라테스(BC470~BC399)→플라톤(BC427~BC347)→아리스토텔레스(B.C.384~B.C.322).」의 체제로 이루어진다.
그들은 오늘에도 우리의 곁에서 함께 대화하면서,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을 하고 있다.
철학자요 수학자인 피타고라스(BC570~BC495)는 “너 자신을 존중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한 단계 더 진화시켜서 “너 자신을 알라.”고 하였다. 이는 우리의 문화대로 해석한다면 속된 말로 “네 꼬라지를 알라, 네 주제를 파악하라.” 하는 내용의 의미로 해석이 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긍정의 맘으로 “네 안에 있는 무한한 모든 것을 알고, 숨은 능력을 발휘하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긍정의 해석인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어느 날 민중들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거리에서 새로운 진리를 찾으라.”고 역설하였다. 그의 사상은 “스스로 무지를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를 인식하는 것”을 말했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에게 “너 자신을 찾으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에 한 말이다. 반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이 있다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그 자체를 알고 있을 뿐이다.”고 말하였다.
한편 예수는 “자기를 깨달은 자는 이 세상 무엇보다 위대하다.”고 하였고, 공자는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으며, 노자는 “나를 비우는 것이 나를 완성하는 것이다”라고 역설하였다.
한편 칼 융은 “나는 선한 사람이 되기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였다. 이집트의 수도승 안토니는 “너 자신을 알라. 그러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다.”고 하였다.
반면 옛 성현들은 “밖에 있는 백만 대군보다, 안에 있는 적과 싸워 이기는 것이 더 힘들다.”고 하였다. 즉 자신과의 싸움이다.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기려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자신의 마음이 평정되어 편안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나 자신을 알고 나면, 다음에는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눈을 떠야 한다. 너 자신을 알라고 하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를 알라는 것이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 채, 헛된 몽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다면, “나는 길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으면 영원히 산다.”라고 말한 이유를 알게 될 것이라 말했다. 한편 붓다는 자신이 말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말한 뜻도 깨닫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는 너무나도 혼탁하고, 모든 매사에 자신은 잘하는데 상대가 잘못이며, 책임과 의무는 회피하고 권리만을 주장하고, 자신은 노력하지 않고 주고받기만을 요구하고 있다. 모두가 이기주의 인간이다.
반면 자신의 주제파악도 못하는 입장에서, 상대를 험담으로 비방하고 욕설로 깔아 뭉개고 있으니, 얼마나 불쌍한 존재의 인간인가! 과연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일까? 그래서 사람은 평등하고 모두가 똑같다고 말할 수 있는가? 반드시 등분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인격인 것이다.
인간들이시여!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요? 나 자신의 주인공은 곧 내 마음이다. 우리는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며 행동하고 돌아다닌다.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든 놈은 내 마음이고, 내 운명을 창조하는 놈도 바로 내 마음이다. 한편 내 인격과 명예를 이렇게 만든 것도 내 자신의 마음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자신을 알고, 내 존재에 대하여 면밀한 파악을 하고, 항상 자기반성을 위한 성찰이 있어야 발전할 것이다.
독자 여러분! 자신을 알고 주제를 파악한 사람은 인생의 깨달음을 안 것이고, 자신의 분수와 처지를 이해하면 나름대로 삶을 되찾은 것이며, 상대와의 좋은 인간관계가 형성된다면 은혜를 입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생활이고 인생이며 행복인 것이다.
안중읍 덕우1리 마을이장
이 세 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