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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 싸게와 소금, 그리고 싸다귀

중2때 까지도 오줌을 못 가렸던 불편한 진실

경기헤드뉴스 성미연 기자 |

 

<연재소설 - 제 4 화>

 

눈이 내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지만 마음은 추억의 회로를 돌리느라 바쁘기만 하다.

펄펄 내리는 눈을 보고 있자면 사람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귀재지심(貴在知心)이 가슴에 파고들어 온다.

 

인간의 자기애는 아무리 열악한 것이라 해도 주어진 조건에 자신을 적용 시키며 그 삶을 합리화 시키려는 습관이 있다. 아무리 불편한 진실이라도....

 

몸뚱이라는 것은 늘 야구감독처럼 우리들에게 각종 신호를 보내며 생존이라는 경기를 컨트롤 하는데, 그 때의 나는 삼진 아웃의 패전 선수처럼 늘 의기소침했다. 고백컨대, 나는 중2 때 까지도 오줌을 못 가리는 호랭이도 안 물어갈 썩을 것이었기에....

 

“하이고~ 호랭이도 안 잡아갈 썩을 것 하고는...또 쌌네 또 쌌어. 새벽 참에 오강에다 오줌을 두 번이나 뉘었고만 또 싸 재꼈는갑네이~ 흐이그~ 호랭이도 안 물어갈 것....”

 

아침부터 할머니의 잔소리에 눈을 뜨니 오늘도 요가 축축하다.

 

“아이 저것을 으쨔쓰까이~ 나이가 한두 살도 아니고 뭔 사단을 내도 내얄 것인디. 아이 중핵생이나 되가꼬 아즉도 오줌을 못 개리믄 아이 고거시 사람이다냐. 나가 참말로 못살긋다냐. 굿을 해야쓰까 어쨔쓰까이. 아, 언능 인나. 요 빨게...아조 찌른내 땜시 나가 못살긋당께”

 

“어이 신샌떡, 자 옷 싹 다 뱃기가꼬 좀 씻기소. 나는 엊그제 맞춰 놓은 한약 찾아 올랑께로. 염병흐고 돌팔인가 으찌 약을 몇 년 째 대놓고 멕이는디 한 개도 안 듣는가 몰러이. 에잇 호랭이도 안 물어갈 것...”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결핍되고 변주곡 같은 생체 리듬 때문에 나는 그 당시 잠자는 것이 두려웠다. 초등학교 6학년 때 5.18사건으로 큰오빠가 죽고 그 이듬해 둘째 오빠도 죽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최고조에 달해 있을 때였다.

 

폐병은 더 심해져 학교도 하루 건너 한번밖에 못 갔는데, 그런 나는 일주일에 서 너 번은 이불에 오줌을 쌌다. 밤마다 꿈에 어찌도 그리 귀신이 쫓아오는지....도망가다 낭떠러지로 떨어지면서 나는 왜 그렇게도 오줌을 싸댔는지 모를 일이다.

 

그 날은 민방위 훈련과 전교생이 서천가로 나가 작은 돌멩이들을 신발주머니에 담아 오는 울력이 있던 날이었다. 운동장에 돌멩이와 소금을 뿌린다고 했다. 전날 준비물로 소금을 두 주먹씩 가져오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이번에도 모래와 흙, 그리고 장비들을 학교에 기부를 한 덕에 늘 그랬듯이 나는 단체 행동에서는 제외되었던지라 담임이 먼저 하교를 하란다.

 

집에 돌아오니 할머니가 평소 같지 않은 굳은 표정으로 내 옷을 홀딱 다 벗기더니 머리에 키를 씌워 옆집 소사떡한테 가서 소금을 얻어 오라며 등짝을 밀어 부쳤다.

 

“할무니 우리 집에 소금 없당가?”

 

“아이 간내야 끔메 싸게 댕기 오랑께”

 

갖은 양약 복용 때문인지 신체발육이 더뎌 초등학교 3~4학년 정도로 비쩍 마른 나는 별명이 ‘멸치’,‘완두콩’,‘빼깽이’로 불리 울 때였다.

 

팬티만 걸치고 창피한 줄도 모른 채 소사 아저씨 집으로 향한다.

 

“소사떡 아줌마 할무니가 소금 얻어 오라고 흐던디요”

 

마침 마당에서 소사댁은 가마솥에 돼지여물을 끓이고 있다.

마당에 무에 주워 먹을 것이 그리도 많았을까.

연신 마당에 머리를 처박고 무언가를 주워 먹는 달구새끼들 사이사이로 비집고 나오며

 

“이~ 할매가 그랬어~ 소금 얻어 오라고? 이~쪼매만 지둘리바이~”

 

표주박에 소금을 한 바가지 들고 나와서 하는 말이

 

“아나~소금이다, 아나~오줌싸개 구신 물렀거라”며 돼지여물 쑤던 나무 주걱으로 내 뺨을 사정없이 때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매를 맞아 본 나로서는 너무 놀라 처음엔 울음도 나오지 않는다.

“언능 싸게 집에 가보시게. 할미한테 소금 꼭 갖다 드리고이~”

 

쪽 찢어진 째보 눈의 소사떡이 이죽거리며 엉덩이까지 나무주걱으로 때리면서 내쫓는데 분해 얼굴만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받아 온 소금을 할머니가 내 몸에 뿌려대며

 

“훠이~ 오줌싸게 구신 물렀거라. 훠이~훠이~”하는데 그 때야 서러움이 북받쳐 울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게 끝이 아니라 대문 앞에 무릎 꿇고 손들고 벌까지 세웠다. 얼마나 서러웠던지 엉~엉~거리며 대성통곡 했는데, 요란한 싸이렌 소리에 울음소리가 묻히는 민방위 훈련 시간대였다.

 

그렇게 나는 적잖은 충격요법 때문인지 아니면, 새로 지은 한약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오줌으로 더 이상 요에 지도를 그리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매를 맞았던 그 소사댁은 내가 어른이 되어 유학 갈 때 까지도 불구대천(不俱戴天) 원수 보듯 했다.

 

기꺼이 악역을 맡아 내 오줌 싸게 버릇을 고쳐 준 은인이었는데도....

 

녹은 눈으로 아파트 현관에 질컥이는 발자국들을 보니 어릴 적 밤마다 요에 오줌으로 그려댔던 지도와 불구대천(不俱戴天) 원수 보듯 봤던 소사댁이 생각나는 밤이다.

 

글 : 성미연

삽화 : 홍봉기 (광양경제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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