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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몸이 새파랬던 ‘야야’는 동네 유일한 내 친구

그 때는 그랬어

경기헤드뉴스 성미연 기자 |

 

< 연재소설 - 제 2 화 >

 

정원 돌 벽 주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간지럼을 잘 타는 코스모스와, 대조적인 색깔의 보라색, 노란색 꽃의 양란이 바람에 허리를 흔들거리며 인사를 하는 어느 일요일 오후.

 

가족들 자기 방식대로의 걱정과 염려의 흔적은 머리맡 쟁반 위를 보면 다분히 알 수 있다.

 

1970년대엔 먹을 것만 챙겨 놓으면 어른들의 할 일은 다 한 것이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보릿고개와 먹을 것이 귀했던 그 때 그 시절엔 그랬다.

 

병원에서조차 받아 주지 않을 정도로 깊은 폐병을 앓고 있던 나의 머리 맡 쟁반위엔 온갖 약들로 가득했으며 그 옆엔 항상 쓴 한약 먹고 입가심으로 먹을 복숭아 간스메(통조림)와 집에서 직접 만든 요깡(영양갱)과 눈깔사탕이 놓여 있었다. 집안엔 아무도 없다. 마당 우물가 장독대 뒤 구석에 자리 잡고 누워 있는 잡종 ‘넓직이’와 조금 놀다 눈깔사탕 몇 개를 호주머니에 주섬주섬 넣고 밖에 어슬렁거리고 나가본다. 아니나 다를까 ‘야야’가 팽나무 숲 돌 벤치에 자리 잡고 앉아 혼자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내가 살던 동네엔 계집아이가 둘 밖에 없었는데 공교롭게 둘 다 몸이 성칠 못했다. 나는 폐병으로 얼굴이 일본 가부끼 화장해 놓은 배우처럼 허여멀건 했고, 내 친구 ‘야야’는 심장병으로 온 몸이 새파랬다. 

 

특히 개구리 왕눈이 같은 손톱과 입술은 진한 보라색이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을 헐떡였기에 그 친구는 학교도 안 다녔다. 그 친구가 유일하게 하는 놀이는 움직이지 않고 팔만 놀리면 되는 공기놀이였다. 그 친구는 별로 말수가 없었다. 

 

모든 걸 눈과 표정으로 표현하던 그 아이는 늘 상 얼굴에 다크함과 우울함이 가득했다. 학교도 안 다녔고 물어봐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기에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으나 나보다 두세 살 많았을 걸로 짐작하는 그 아이는 유난히 손이 커서 손 등에도 돌 공기를 잘 올려 놓았으며 공기도 아주 높이 올려 잘 집었다.

 

공기놀이 하면서 놀고 있던 우리들을 보며 짓궂은 동네 머스마들이 한마디씩 주둥이를 놀리고 지나간다.

 

“어~이~ 빙신들끼리 잘도 논다네~”

 

지금은 옆에 오빠들이 없으니 꼼짝없이 놀림을 당하면서도 어디 두고 보자는 심보를 담아 최대한 사악한 표정으로 눈알이 빠져라 앵그라 보는 걸로 나는 노여움을 표현하는데 ‘야야’는 그런 놀림에도 시크하게 무표정이다.

 

“개새끼들 가만 안 둬. 오빠들헌티 다 일라가꼬 다 죽이뿌라 글꺼여”

 

나한테는 감프고 독한 싸움꾼 쟁이 오빠들이 셋이나 있었기에 아이들 놀림에도 기세가 등등했으나 ‘야야’는 나보다 더 어린 여동생들만 셋이 있어 그런지 나하고는 사뭇 행동이 달랐다.

 

“야야 ~하이고마 우리 예쁜 연이가 같이 놀아주고 있었나. 하이고야 볼 딱지 터지긋꾸마. 또 눈깔사탕 묵고 있었는갑제. 그 마이 무으믄 이빨 썩는 데이. 야야 쪼매만 더 놀고 들어 오그래이~ 씬 바람 쐬면 몸에 안 좋다 아이가”

 

야야 엄마가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집에 들어가시며 말을 건네는데 머리가 껑충하다.

 

“어? 아줌마 그 머리...”

 

“아~내사 귀찮아가 마 짤라 삣다 아이가”

 

동네 아줌마들의 부러움을 샀던 야야 엄마의 머리카락은 흑단처럼 고왔다. 어린 내 눈에도 동백기름 발라 놓은 것처럼 윤기가 좌르르 흘렀었다. 한 묶음으로 곱게 땋아서 늘 한 쪽 옆으로 가지런히 늘어뜨리고 다녔던 야야 엄마였다.

 

야야 엄마가 집으로 들어가자 야야가 무릎에 얼굴을 처박는데 나는 쓸데없이 복잡하고 예민해진다. 잠시 후 고개 들어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을 지금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 순간, 숨 막힐 듯 짧은 친구의 그 흐느낌 속에 차갑고도 위험한 냄새가 왠지 이 친구와 마지막일거라는 찰나적 예감이 들었다.

 

눈빛으로 나에게 인사를 하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흐느적거리며 힘겹게 집으로 들어가던 친구의 뒷모습을 나는 한 참 동안 바라보다가 뛰어가서 호주머니 안에 남아 있던 눈깔사탕을 모두 꺼내 친구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며칠 후 할머니와 아랫집 소사댁 아줌마가 마루에 걸터앉아 물에 퉁퉁 불린 마늘을 까며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쩌어그 머시냐 그 염샌떡 애기가 끔메 죽었담서요?”

 

“이~글씨 그랬다네...불쌍흔거, 좋은 약 한 채도 못 멕이 보고 보냈다고 가심을 뜯어감서 운디 아조 죽것드랑께. 그 곱디 고븐 머리카락 잘라 가꼬 팔아서 보약 한 제 지었는디 그것도 다 마저 못 멕이고 보냈담서 을매나 가심을 침시로 울어 쌋는가 하이고 못 보것대야”

 

“긍께요이....하이고 참 나 얄굽기는...새끼 먼저 보내놓고 어찌 살것능가요이”

 

집에 노상 혼자 있는 내가 짠하다며 할아버지가 사 준 잡종강아지 '넓직이'랑 새끼 고양이랑 같이 놀다가 귓 속으로 들어와 버린 친구의 죽음...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팔소매로 훔치며 '야야'가 늘 앉아 공기놀이하던 시멘트 벤치에 나갔더니 야야 엄마가 축 늘어진 모습으로 앉아 계신다.

 

퉁퉁 부은 눈으로 가만히 나를 불러 옆에 나란히 조심스레 앉았다.

 

“니도 알제~우리 미숙이 하늘나라 먼저 간 거. 미숙이캉 친구해줘서 고마웠데이~”

 

나는 그 때 알았다. 아줌마가 친구를 부를 때 “야야”하고 불러서 이름이 ‘야야’인 줄 알았는데 진짜 이름이 미숙이었다는 것을....

 

어린 나에게 아빠의 죽음은 기억에 없다보니 슬픈 줄 몰랐다. 하지만 그 친구는 내가 처음 죽음으로 이별을 경험한 첫 케이스였다. 때가 되면 손으로 태엽을 돌려줘야 돌아가는 장난감처럼 그 친구의 죽음을 잊기에는 말 그대로 인위적인 노력이, 힘이 들었다. 그 버거움이 힘들었다.

 

나 또한 죽음의 냄새를 시시각각 사방에서 맡아야 하는 처지였기에 더 더욱 힘들었다.

 

살아 있는 동안에 푹 푹 쌓인 잡동사니와도 같은 기억을 품고 있다가 비눗방울 터지듯이 그 친구의 죽음의 기억들이 하나 둘 사라져 버리길 애썼다.

 

그런데 어차피 기억이란, 그리고 시간이란 지엽말단적 기능을 담당할 뿐이라는 걸 나중에 무르녹은 연륜을 가지면서 알게 되었다.

 

가끔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은 마치 피를 탁하게 만드는 찌꺼기 지방처럼 나의 가장 고통스럽고 내밀한 상실들이 저장되어 있는 마음 제일 뒤 칸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한 번씩 자기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듯 생각이 난다.

 

내 친구 ‘야야’는 아니, ‘미숙’이는 앞으로도 얼마나 깊숙한 세월동안 나를 이렇게 붙잡고 있을런지...

 

글 : 성미연

삽화 : 홍봉기(광양경제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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