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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오페라의 증인, 라 트라비아타 '김자경'

용인의 예술혼을 깨우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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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헤드뉴스 성미연 기자 |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용인은 예로부터 수많은 선현을 배출한 역사적 인물의 고장이다. 특히 한 말에서부터 근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문화예술을 대표하는 저명예술가들이 용인 출신이거나 용인에 연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용인의 크나큰 자긍심이기도 하다. 

 

조선 말 평생 나비 그림만 3천여 점을 그린 나비 화가 남계우 선생을 비롯하여 한국무용의 양대 산맥인 이동안과 한성준을 키워낸 김인호 선생, 일제 강점기 동양의 흑진주라 했던 세계적인 댄서 최승희, 그리고 우리나라 오페라의 전설 김자경 선생에 이르기까지 예인들이 용인의 예술 혼을 품고 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용인의 문화 자산인 셈이다. 이에 본지는 용인 연고의 저명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재조명하면서 그들의 삶과 예술 행적을 기획 연재로 소개하고저 한다.  <편집자 주>

 

한국 오페라의 초석을 다진 전설적인 성악가, 김자경(金慈璟, 1917-1999)선생이 용인 출신 미술가와 결혼하여 용인사람이 되었고, 지금도 용인에 영면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김자경 선생은 한국 최초의 오페라 무대인 1948년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춘희)’공연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1950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 카네기 홀에서 공연하였고 1968년 한국 최초의 민간 오페라단을 창단하여 평생 오페라 발전에 헌신한 인물이다. 또한 이화여대 교수로서 적극적으로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1983년 이화여대를 정년퇴임할 때까지 소프라노 이규도, 송광선, 메조소프라노 김학남 같은 거목들을 길러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김자경 선생을 가리켜 ‘한국 오페라의 증인’, ‘한국 성악의 대부’라고도 칭한다.

 

그런 그녀가 용인 출신 미술가 심형구와 결혼하여 살면서 자신의 고향은 북한 개성이라 갈 수 없으니 남편의 고향인 용인을 고향으로 여기며 산다고 늘 말하였고 사후에 용인에 묻히면서 영원한 용인사람이 되었다.

 

김자경 선생의 고향은 황해도 개성이다. 아버지는 김영환(金永煥)으로 원래 서울에 살았는데 스무 살 되던 해 당시 열여섯 살이던 어머니 열쇠(烈釗)와 결혼하여 개성으로 이주하게 된다. 김영환은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공부하여 1년여 만에 약제사 허가를 받고 개성에 약방을 차렸다. 음악에 소질이 있던 부부는 교회에서 음악을 맡았으며 어머니 열쇠는 여학교에 다니던 중 임신하여 김자경을 낳았다.

 

개성에 있던 브래넌(L.C.Brannon)이라는 선교사가 서울에 있는 신학교로 갈 것을 권유하여 김영환은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온 김자경은 이화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신학교를 졸업한 아버지가 원산에 있는 브래넌 선교사를 돕기 위해 원산으로 이사하면서 김자경은 루씨보통학교 6학년에 편입, 이후 루씨여고에 진학한다.

김자경은 여덟살 때부터 선교사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여학교에 들어가 서양음악을 하려면 우리 음악도 알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가야금, 장고, 소리, 민요 등을 배웠다. 대학 진학 때는 아버지 자신이 마치지 못한 의학 공부를 권유하여 동경여의전에 가려 했으나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이화여전 피아노과에 입학한다.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각 종 음악회에서 노래로 수상하는 등 성악에도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학교에서도 성악공부를 하면 더 좋을 것 같으니 졸업을 1년 연장해서 성악공부를 하면 성악, 피아노 두 과의 졸업을 인정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장학금을 받고 성악과로 전과하여 채선엽 교수에게 레슨을 받았고, 1940년 이화여전을 졸업한다.

 

졸업 후 미국 유학을 꿈꾸었으나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꿈을 접고 이화여고 음악교사로 들어간다. 이 곳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심형구 선생을 만나게 된다. 1941년 동경 비터레코드사에서 취입을 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 심형구 선생이 동경까지 찾아와 청혼을 했다. 그는 1년 전 상처한 상태였으므로 주위의 반대가 매우 심했지만 김자경은 결혼을 허락하고 1941년 10월 독창회를 마친 후 그 해 12월 26일 결혼했다.

 

광복되던 1945년부터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았고, 1948년 명동 시공관에서 공연한 한국 최초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춘희)’에서 주인공 비올레타 역으로 열연했다. 1948년 8월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 유학, 1950년 5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뉴욕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갖고 당시 미국 언론을 크게 장식했다. 한국 무용가 조택원에게 한국 무용을 배워 독창회 후 한국 무용을 보여줌으로써 미국에서 호평 받는 등 1백 회 넘게 공연하였다. 세계적인 테너 리처드 터커와 함께 오페라 카르멘을 공연하기도 했다.

 

미국 생활 10년 만인 1958년 귀국하여 이화여대 음악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1983년 정년퇴임하기 까지 25년 동안 교육자로 헌신하면서 그 자신이 포기했던 세계적인 성악가의 꿈을 제자들이 이룰 수 있도록 지도했다. 소프라노 이규도, 남덕우, 이연화, 송광선 메조소프라노 김학남 같은 유명 성악가들이 그의 제자이다.

 

모교 미술대학에서 재직하던 남편이 사망한 1962년,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오페라단을 창단한다. 벙어리 저금통에 1백만 원이 모이자 다른 대학의 남자 교수를 찾아가 오페라단 창단 계획을 의논했을 당시 그 교수가 충고했다. “돈이 있으면 놀러나 다니시오. 학생들에게 고맙다는 말 듣기는커녕 자기 발등만 찍힐 것이오. 제자들 키워 봤자 결국은 내가 설 무대만 없어지는 것 아니오?” 이게 격분한 그녀는 “제자 키우는게 고맙다는 말 들으려고 하오? 그리고 제자 키워서 내 발등 찍혀야지 나만 못하게 가르치시려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이 짤막한 일화에서 그녀의 남다른 제자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이처럼 오페라단 창단을 밝혔을 때 주변의 반응은 만류와 핀잔 뿐이었다. 오페라를 하면 망한다는게 이유였다. 당시 서양에서 들어 온 오페라를 아는 사람도 없고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는 우려였다. 그러나 김자경은 자신의 계획대로 ‘오페라 운동’의 선봉장으로 나선다.

 

그녀는 오페라 티켓을 007 가방에 넣고 기업체와 언론사 사장실을 방문해가며 티켓을 팔고 다녔다. 오페라 한 편을 공연할 때마다 100여 개의 기업체를 방문하며 티켓을 팔았다. 집문서를 담보로 경비를 조달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예술을 향한 샘솟는 열정과 불도저 같은 추진력, 김자경 선생이 일 년에 한 번도 힘들다는 오페라 공연을 매년 봄, 가을로 두 차례씩 무대에 올린 데에는 물러설 수 없는 ‘사명감’같은 것이 있었다. 한국 오페라의 대중화와 세계무대 진출이라는 꿈이 그것이었다.

 

 

김자경 선생은 헌신적이고 활발한 예술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예술원상(1974년)을 비롯해,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1974년), 중앙일보 문화대상, 국민훈장석류장(1983년), 올해의 음악가상, 세종문화상(1987년), 프랑스 문화예술 훈장(1992년) 등을 받았다.

 

1999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가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뽑혔으며, 대한민국예술원 정회원과 사단법인 김자경오페라단 이사장으로 활동 하다가, 1999년 향년 82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근삼리에 안장되어 있다.

 

저서로 자서전인 『눈으로 듣는 삶의 노래』가 있으며, 한국민간오페라 운동의 선구자로서 한국에서 오페라가 뿌리를 내리고 발전을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남편 심형구(沈亨求, 1908-1962)는 운보 김기창 선생의 수제자로서,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용천리에서 경기 광주 군수를 지낸 심종협(沈鍾協)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백암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니다가 서울로 전학을 했는데 일찍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서울 제2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미술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했다. 이화여고에서 미술교사로 근무, 광복 후에는 이화여대에 미술학과를 설립하여 초대 학과장이 되었다.

 

김자경과 함께 미국에서 9년(1949-1958)간 머무르는 동안 뉴욕 아델피아 대학(Adelphi University) 회화과 초청 교수로 재직하였다. 1958년 귀국 후 이화여대에 복직하고 동 대학 박물관장도 겸임하면서 국전 심사위원, 국전 초대작가 등으로 활약했다. 이처럼 심형구는 우리나라 최초로 이화여대에 미술학과를 설립하고 조선미술가협회 이사를 지내는 등 한국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한편으로는 친일파 미술인이라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

 

참고 문헌 : ◎ 김자경 [金慈璟](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눈으로 듣는 삶의 노래(저자:김자경, 출판사:삶과 꿈. 1997.9.9.)

           ◎ 기독교대한감리회역사정보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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